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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겐 ‘영원한 젊은 오빠’ 남성에겐 ‘듬직한 맏형’ 남 진

“무대에 서면 50년 된 히트곡도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부른다”

[ 시니어가이드 안기훈 기자 ]

 

 

그는 1945년생 해방둥이다. 76년이 흐른 2021년 그에게서 나이와 늙음은 보이지 않는다. 웃을 때 보이는 주름마저도 완성 단계에 이른 조각상의 한 새김 같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정을 내린 결과들의 단층이 보여주듯이, 그는 스스로를 조각하는 힘이 남다르다. 그래서 ‘오빠 부대의 원조’,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평가된다. 대한민국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 남진을 만났다.

 

‘짧은 인생 살아도 꿈과 사랑 있다면/천년만년보 다도 나는 그 길을 가리라/그대 눈물 닦아 줄 내 노래가 있다면/그대 가슴 설레는 내 노래가 있다 면/너와 함께 그 길을 가리라’. 
최근 남진 자신이 노래하면서 스스로 감동받는 곡 ‘천년을 살아도’의 가사 일부다.

 
남진은 “이제 조금 알 것 같은데 좀 하려니까 이 나이가 됐다. 몸 관리 잘해서 팬들에게 좋은 곡, 좋은 가사가 담긴 음악으로 꼭 보답하고 싶다”고 말한다.
기계도, 자동차도 10년 정도 지나면 부품도 틀도 닳고 녹이 슬어 다시 바꾸기 마련. 기계로 치자면 예닐곱 번은 부품과 외관을 갈았어야 할 나이다. 그 역시도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매일 매 순간 느낀다. 하지만 무대에서는 ‘영원한 대한민국 청춘의 아이콘’으로서 변치 않는 모습을 팬들에 서 ‘선사’해야 하기에 연습, 또 연습을 한다. 


3시간 발성 연습, 늘 다시 시작
“노래라는 것은 힘이 필요한 거예요. 운동을 세 시간 동안 하고 발성연습도 하고 그러는데. 조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노래를 다시 시작했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가슴 아프게’를 부른지 55년이 되었잖아요. 히트곡 같은 경우 제가 50 여 년을 불렀으니까 적어도 만 번 이상은 불렀을 거예요. 그 노래의 가사는 50여 년 전 가사와 똑 같지만 표현의 방법은 다르게 가야겠죠. 가사와 멜로디는 똑같은데 마음은 새 마음이니까 새 곡이 되는 거죠. ‘빈잔’도 새로운 ‘빈잔’을 부르는 거죠. 그 때 불렀던 감정과 가사의 해석이 지금은 또 달라요. 내가 그 가사의 말이 되고 주인공이 되는 거죠. 그 주인공이 20대와 30대, 40, 50대의 사람이 다른 것처럼 노래 자체도 바뀌는 거예 요. 이것은 제가 찾아야 하는 거죠. 76살의 나를 찾는 거예요.” 

 

그의 노래들이 수십 년이 지난 같은 곡인데도 들을 때마다 결이 다른 감동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완벽한 노래, 표정, 박자, 감정을 위해 매일 노력하는 그의 평생의 연습 이 무대에서 빛을 발하고 청중들은 그렇게 다듬고 또 다듬어진 노래와 몸짓에 열광하는 것이다.

 

 

 

나이 많다고 늙지는 말아야 
“그런데 70대의 내가 늙은 70대가 되어서는 안 돼요. 감정만 70대가 돼야지 소리가 늙거나 생각이 처지면 안 된다고 봐요. 인생 경험의 70은 쌓되 소리와 감각은 현대적이어야 하죠.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제대로 될 것 같아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 밖에 없어요. 연습과 마음가 짐으로 길 위에서 길을 찾아가고 있지요.”

 

남진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 가장 잘 불렀다고 자랑하는 곡이 없다. 단지 무슨 노래든 자신의 색깔이 있게 불렀다는 자부심만 있다. 자기 색깔로, 지금 감동하는 무대를 만들어내기 위한 연습 이 그의 몸과 마음에 밴 이유이기도 하다.

 

“팬들이 있어서 제가 있지요”
그의 노래에는 언제나 그가 사랑하는 ‘대중’이 있다. 대중 가수는 대중과 호흡해야 한다는 게 그의 철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송 출연, 공연 섭외, 토크 쇼 등에 기쁜 마음으로 출연한다. 까마득하게 나이가 어린 후배들과도 협업해서 신곡을 내거나 공연을 한다.

 
“반세기 이상 동안 노래할 수 있다는 건 팬들 덕분이지요. 팬들이 있어서 제가 있는 것이기에 소중한 존재입니다. 긴 세월 하고 싶은 노래를 할 수 있게 해준 팬들을 실망하게 하면 안 된다는 마음을 먹지요.” 


‘아, 흡족하다’ 느낀 적 없어
2011년 6월 MBC-TV ‘나는 가수다’에서 그리 알려지지 않았던 김범수는 남진의 70년대 대히트곡 ‘님과 함께’를 자기 스타일로 편곡해 불러 순식간에 대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해 9월 남진은 화답하기라도 하듯 MBC-TV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 나가 심수봉의 '비나리'를 ‘남진 스타일’로 불렀다. 청중과 시청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전설이 전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저는 그때 개인적으로 ‘비나리’란 곡의 가사를 좋아했어요. 가사가 매력이 있으니까. 나는 즐기면서 부른 거예요. 청중과 시청자들이 그렇게 뜨겁게 받아들일 줄은 꿈에도 생각 안했지요. 그 정도로 공감을 줬나 하며 저도 놀랐어요. 그 이후 ‘비나리’를 많이 불러요. 신청이 쇄도하니까.” 남진은 그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말했다. ‘무대에서 노래하고 나면 항상 아쉽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 흡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노래, 표정, 박자, 감정,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하는데, 항상 부족하다’고.

 

무대 위 ‘완전한’ 남진, 내려오면 소탈
그의 성격은 대중가요 바닥에서 소문 나 있듯이 편한 걸 좋아한다. 무대에서 내려와 사람들이 사는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생활인 ‘김남진’으로 돌아온다.
무대 위에서나 무대 뒤에서나 언제나 소탈하다. 그 상대가 누구더라도, 어떤 화제를 꺼내놓아도 그는 떠들고 얘기하기를 사심(私心)없이 즐거워 한다. 7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공연이 끝나면 타고 갈 자가용을 먼저 보내고 털털거리는 공연단의 전세버스를 탔다. 공연단과 떠들고 술 마시는 그런 유쾌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다양한 장르 넘나드는 가수
일반적으로 한 가수의 곡이 히트를 치면 그 히트곡의 장르에 갇혀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지 못하고 평생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남진은 팝 스타일이라든가 빠른 템포라든가, 라틴, 트로트 그런 모든 것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감사하죠. 제가 어릴 때 가요와는 거리가 있었고 팝을 좋아했어요. 그러다 가수를 하다 보니 가요를 듣게 되었죠. 저 역시 한국 사람이 아닙니까. 1년 정도 팝으로 노래를 배우는데 제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 “이놈아, 아무리 한국 사람이 팝을 불러도 외국 사람보다 더 잘 부르겠냐? 한국놈이 한국 노래를 해야지. 가요를 한 번 배워봐라!” 말씀하시더라고. 이후 최희준 선배님의 스타일을 많이 모창했죠.”

 

남진을 가수로 만든 ‘하숙생’ 최희준
남진이 가수가 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매력적인 저음으로 ‘하숙생’을 부른 최희준이다. 
“최희준 선배님의 노래로부터 가요의 매력을 알기 시작했죠. 예전에는 못 느꼈어요. 냇 킹 콜을 중학교 때 많이 들었어요. ‘Too young’, ‘Mona Lisa’ 같은 노래들. 제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가수가 최희준 선배님이에요. 제가 맨 처음 부른 가요도 ‘맨발의 청춘’이고. 대한민국에서 최희준 선배님 흉내는 절 못 쫓아올 걸요? 공연 때도 해요. 남인수 선배님, 현인 선배님, 마지막에 최희준 선배님 순으로 모창을 해요. 똑같이 따라 해서 객석에서 박수도 많이 나오지요. ‘맨발의 청춘’, ‘하숙생’, 그리고 ‘종점’을 많이 불러요. ‘종점’이 제 18번입니다.”

 

어머니가 고른 ‘울려고 내가 왔나’ 대히트 
남진은 1965년 스탠더드 팝 계열 곡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했으나 실패, 두 번째 음반 (타이틀곡 ‘연애 0번지’)도 금지곡 처분으로 실패를 거듭했다. 
고향 목포로 낙향하여 술로 세월을 보내던 중 그의 어머니가 두 번째 앨범에 담긴 다른 트로트 곡인 ‘울려고 내가 왔나’로 재도전할 것을 권유했다. 2집 레코딩을 할 때 트로트 부르기가 창피하다는 이유로 남진이 거절했던 곡이었다. 작곡자가 노래가 아까우니 자신이 불러서라도 음반 맨 끝에 넣겠다고 했으나, 그가 사정이 생겨 녹음 시간에 오지 못하게 돼 내키지는 않지만, 남진이 불러서 앨범 맨 끝에 집어 넣었는데, 이 곡이 그야말로 공
전의 히트를 쳤다. 남진이란 이름은 그렇게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싫어한 트로트로 대히트, ‘댄스’로 이어가
트로트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트로트 곡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67년 ‘가슴 아프게’로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하며 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후 골반을 흔들고 다리를 털며 로커빌리 스타일로 부른 ‘마음이 고와 야지’는 그를 트로트 가수에서 일약 외모, 음악, 매너로 소녀팬들의 팬덤현상까지 이끈 당대 최고 만능 엔터테이너형 가수의 자리로 올려놓았다. 그의 말대로 그때는 춤추는 가수가 없었다. 그것은 최초의 시도였다.  

 

잘생긴 얼굴,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따라한 창법과 무대 퍼포먼스에 소녀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는 ‘그대여 변치 마오’, ‘님과 함께’ 같은 대표곡으로 이어졌다. ‘님과 함께’는 전국이 열광하게 만들었다. 가는 곳마다 팬들은 열광했고 그가 어느 지역에서 공연을 하게 되면 그곳은 공연 며칠 전부터 마치 축제를 즐기는 것처럼 흥겨움에 술렁이곤 했다.


원래 특기는 연극, 배우가 꿈
남진은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원래 특기는 연극, 배우가 꿈’이었으니 톱스타 반열에 오른 이후 60여 편 영화에 출연한다. 김지미, 윤정희 등 당시 최고의 여배우와 함께 연기했다. 당시 10만 명 관객몰이를 할 정도로 흥행에도 성공해 영화배우로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부유한 환경, 어린시절 연극, 음악에 심취
남진은 전라남도 목포에서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옥의 늦둥이 겸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부터 연극, 음악에 심취할 수 있었다. 학생 때부터 닐 세다카, 폴 앵카 등의 팝송을 즐겨 불렀던 남진은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레스토랑에서 팝송을 불러 밴드마스터에게 가수 제의를 받을 정도로 노래에 소질을 갖고 있었다.